R. Strauss, Violin Sonata in Eb, Op.18 II. Improvisation, Andante Cantabile

Akiko Suwanai, violin / Enrico Pace, piano


  불출(不出) 하나 ― 아들 이야기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들 녀석이 아침 밥상머리에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드릴 말씀이 있노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제부터는 아빠를 아버지로, 엄마를 어머니로 부르겠으니 그리 아시란다. 얘기인즉슨 이제 저도 어엿한 학생이 되었으니, 애들이나 쓰는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에 점잖게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녀석의 진지한 모양새에 눌려 ‘그래 네 뜻대로 하렴’ 하고 대꾸하고는, 입학식이니 꾸릴 것도 없는 가방을 챙긴다고 아이가 달떠있는 사이에 역시 놀란 얼굴의 아내와 서로 마주보며 쿡쿡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니고, 녀석은 나름대로 여러 번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을 터이니 되레 기특하기도 한 일인데 왜 웃음이 났을까.

  어쨌거나 녀석은 그 후로 여태껏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또박또박 아버지, 어머니로 아비 어미를 불렀다. 데리고 시장에라도 다녀오고 나면 아내는 듣보는 사람마다 무슨 아이가 그러냐며 대견해한다고 기꺼워하면서도, 왠지 아이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녀석에게, 아버지는 네 뜻대로 불러도 좋은데 어머니는 더 자랄 때까지 엄마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중재(仲裁)하려 들었다가, 남자가 한번 말을 꺼냈으면 지켜야지 어떻게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특별한 까닭도 없이 물러서느냐고 무안(無顔)만 당했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네 생각이 옳아.

  녀석은 한여름 집안에서도 양말을 벗지 않았다. 집에서 반바지를 입는 것은 아주 많이 양보하는 것인데, 그나마도 외출할 때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셔츠의 단추는 맨 위의 한 개 이상은 절대 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이가 보고 배우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그 아비 되는 인사는 집안에서의 복장이 지극히 자유스러운 편이었으니 대체 어디서 누구를 보고 그러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운데 양말도 벗고 짧은 바지에 민소매 옷을 입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권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한결같았다. ‘옷차림이 단정한 것이 좋지 않느냐, 그런데 왜 보기에 거북한 차림을 하라고 강요하려고 드느냐’라고 말이다.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책 읽는 취미를 길러주려고 이것저것 책은 많이 사 주었으니 그것들 속에서 녀석에게 그런 영향을 끼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싶지만, 이건 아직도 확인된 바 없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그즈음 흔하게 유행하던 머리에 노랑물들이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 이게 웬일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더니, 그 실은 어쩌다 해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다 자라서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주 조금씩 융통성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녀석은 차림새에 관한 한 구닥다리였다.

  그렇다고 생각도 그렇게 꽉 막힌 샌님이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기도 하고, 또래의 친구들보다 웅숭깊게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고, 약하고 여린 것들에 연민을 가지기도 했으니, 자식을 둔 어느 부모에게 그렇지 않으랴마는 참 복스러운 선물이 아닐 수 없는 녀석이었다. 특별히 물주고 가꾼 일도 없는데 튼실하고 보기 좋게 자라는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이러하겠다 싶을 만큼.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녀석을 맞으려고 아내가 대문을 열고 바라보니, 두 손에는 라면상자가 하나 들려있는데 말도 없이 닭의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더란다. 제 어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려 한참 더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하고 나서야 들려주었다던 이야기는 간명했다. 학교를 막 벗어난 길에, 차에 치었는지 죽은 비둘기의 사체가 있는데, 애어른 할 것 없이 숱해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서도 아무도 그 불쌍한 비둘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빈 상자를 하나 주워 죽은 비둘기를 담아 들고 집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 비둘기는 그날, 녀석의 간절한 애도(哀悼) 속에 뒷동산 양지바른 기슭에 고이 묻혔다.

  그런 녀석이 지금 군 복무 중이다. 나라 지키라고 군엘 보냈더니 웬 전투경찰에 차출이 되어 남도의 어느 전경대에 속해 있다. 눈을 뜨면 시위 진압 훈련을 할 것이다. 상황이 생기면 시위대와 맞서 ‘나라’를 지키겠지. 요즘은 소외된 농민들의 시위가 잦으니 참 걱정스럽다. 농부의 자식인 주제에 목숨을 내걸고 농사(農事)를 지켜보겠다는 농민들의 심사를 몰라라 하기도 어렵고, 시위대에 끌려가 매를 맞는 전경들을 바라보는 마음도 참 편편찮다. 더 걱정인 것은 녀석이 그 농민들이 안 됐다고 스스로 무장을 풀어버리고 그들 속으로 뛰어들까 봐서다. ‘할아버지가 농부셨으니 너도 농부의 자식인 거야,’ 이제 와 보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그딴 소리는 왜 해서 키웠는지 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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