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 제주 사시는 사진가 김봉선 님의 사진입니다





2005년엔가 제주 섬 속의 섬, 우도에 간 일이 있다.
그때 내겐 일행들이 저마다 가진 우람하게 생긴 카메라가 없었다.
손에 쥐면 감쪽같이 숨길 수 있을 만큼 작은 똑딱이를 들고, 소위 '사진을 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날의 그 모임의 목적은 사진을 찍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늘 분신처럼 덩치 큰 사진기를 들고 자기네들 키보다 더 큰 삼각대까지 울러메고 다녔다.
삼각대가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나는 그래도 그 성냥갑 만한 똑딱이로 그들이 찍는 것을 다 찍었다.
지금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의 내 사진이, 그들이 찍은 것과 무엇이 달랐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모처럼 그때 일행이었던 한 사진가의 홈피에 들러 우도 사진을 찾아놓고 보니, 과연 다르긴 다르다.
그는 프로였다.
그래도 슬프지는 않다. 나는 아마추어니까.




Chopin, Nocturne No.8, in Db major, Op.27, No.2
(Arranged for string quartet by Dave Scherler)
Stradivari Quartett, plays







  우도(牛島)


  우도
(牛島)는 겸손하다. 느닷없을지도 모르는 이 말이 내가 처음 만난 우도의 인상(印象)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기 전 성산(城山)에서 바라보이는 섬은 턱없이 낮아 보였다. 저게 우도입니다, 소개하는 이의 손끝을 따라 연둣빛 언덕과 그 위에 세워진 등대에 눈길이 머물렀을 때는 퍽이나 실망스럽게도 섬은 낮게 엎드린 자세였는데, 사람들은 그걸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들 했다.
  눕다니, 소는 눕지 않는다. 소는 땅에 배를 대고 그저 순하게 엎드릴 뿐이다. 소는 엎드리지만, 머리를 아주 내려놓지는 않는다. 어디에든 코끝을 파묻는 개처럼 천박하지 않다.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지 않아도 그렇게 엎드린 소의 엉덩이쯤이 될 우도봉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겸손이란, 남에게 자기를 낮추어 양순하게 대하는 태도다. 우도는 가파르지 않은 모양으로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어 저를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우선 놓이게 한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 너머에 섬은 이른 아침의 순한 빛을 받아 순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소처럼 순한 모양으로 가슴을 열고 있었다.
  배가 섬으로 다가갈수록 그저 만만하기만 한 봉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찾는 이를 주눅 들게 하지는 않았다. 아니 되레 아침 햇살을 되비치는 우도봉의 등대가 고향 가는 길의 이정표처럼 다감하게 웃고 있었다.

  겸손이란, 남보다 자신을 드러내어 뽐내지 않는 마음이다. 우도에는 키 큰 식물이 많지 않다. 있어도 스스로 난 것이 아니라 부러 심은 것이라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머나! 탄성을 지르며 그날 우리 일행이 만난 서빈백사의 산호모래는 나지막이 제 몸을 누이고 간단없는 물결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직 다 피지 않아 다문다문한 갯쑥부쟁이들은 한껏 몸을 낮추고 연보랏빛 꽃잎을 인 채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자란 새*는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낮은 물결을 지어 보이고 있을 뿐 한 번도 허리를 꼿꼿이 펴보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이는, 한껏 키를 낮춘 해송도 여린 풀잎들처럼 아담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제 몫의 삶을 그렇게 담담하게 살아내는 것이었다.

  겸손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비굴하지 않은 당당함이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육지에서 소위 잘나가던 어떤 이가 그 삶의 터전을 벼리어 그곳의 어떤 젊은이와 함께 우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저간의 우여곡절이야 다 알 수 없고 또 알 바 아닌 일이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당당했다.
  서로를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되 비굴하지 않은 당당함이 우도에 사는 이들에게는 응당하고 마땅한 심성인 듯싶다. 작은 차의 적재함에 조리대를 마련하여 공원 모퉁이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파는 그와 그의 배우자와 그의 친구와 강아지까지…, 그들의 떳떳한 모양새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혹시 어떤 사람들은 섬을 떠나 남들 앞에 빠기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할지 모른다. 혹은 어떤 쑥부쟁이들은 육지의 것처럼 으쓱 어깨를 들어올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떤 새들은 억새처럼 마디를 짓고 제 키를 키워 올리고 싶어 할지 누가 아는가.
  하지만 허튼 젊은이들에게 좋은 스승이 있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그 길을 바로잡아 주듯이 우도에는 그들을 다독이는 손길이 있다. 바람이다. 간단없이 불어오는 바람이다. 끊임없이 섬을 쓰다듬는 바람이다.
  바람은 쑥부쟁이의 여린 꽃받침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겸손하라.
  바람은 새의 낭창한 허리를 휘돌아 불며 속삭인다. 겸손하라, 겸손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꺼운 것은 우도에 사는 이들과 그 푸나무들이 수런수런 저희끼리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바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속살거린다 해도 제멋에 겨운 종자가 왜 없으랴 싶지만, 섬을 다 돌아보고 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타고 되돌아 나올 때까지 되바라진 어떤 이도 만날 수 없었으며 웃자라 가지 찢기는 나무도 없고 마디를 지어 올리려다 꺾이는 새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겨우 한 차례 다만 몇 시간의 여정으로 우도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달포쯤, 아니 다만 사흘 동안만이라도 섬에 머물러 그의 머리 밑과 발치의 티끌까지도 들추어 보고 나서야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싶지만, 아아 그리고 서빈백사의 흰 모래 같은 밝음이나 검멀래 검은 모래를 닮은 부드러운 품성 하나쯤 배워 품어 안고 돌아가고 싶지만, 어쩌랴! 다만 우도에 부는 그 바람에 씻긴 심장으로 저들의 겸손을 느끼고 만져보는 것만으로 사흘을 삼고 달포를 삼아야 하는 이 심사(心思)를. (2005. 9)


─ *새 : [식물]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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